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 (문단 편집) === [[고조선]]과의 연관성(?) === [[장군총]]과 한무제 무릉 간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 방추형 계단쌓기는 고구려에만 존재하는 무덤 양식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고유 양식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야 문명]]의 [[치첸 이트사]]도 [[고구려]] 건축물이라는 주장을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KBS]]에서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2923849|진지하게 주장했던 적이 있다.]] 즉 이 주장을 긍정한다면 그들이 파놓은 [[멕이코|다른 함정]]에도 같이 빠지는 것이다.] ||<-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0px-China_Shaanxi.svg.png]] || ||<-3> 중국 [[섬서성]] || 그렇다면 장문구의 증언은 무엇인가?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글의 원문을 그대로 싣기 위해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 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 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 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 있었고, >도착한 우리 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 것이 대단했어요. > >거대한 벽돌 피라밋 지하 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 >우리는 난생 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 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 >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 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 체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 >그날 밤, 발굴 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 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 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 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하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장문구(張汶邱)의 임종 전 증언내용...이라고 알려진 글. * 중국 측이 은폐하기 시작했다는 시점은 2차 세계대전 시점이라더니 1963년에 비로소 [[동이]]족 문물이라고 깨닫는다. 그 전에는 감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 저 말을 믿으면 조사 3일 만에 4팀으로 나뉜 발굴단 36명이 유물 18,000여 점을 일일이 작성하였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 증언을 한 사람은 [[발굴]]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 주장에 따르면 해당 피라미드가 1960년대에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진시황릉]]은 1970년대에 발굴되었다. 그럼에도 진시황의 또다른 유물 운운하는가 하면, 아직 찾지도 못한 진시황의 시체와 모습이 똑같은 시체가 존재했다는 서술까지 나온다. 게다가 글쓴이는 무덤의 주인이 상투를 틀었다고 주장하며 은근슬쩍 [[진시황]]도 [[동이]]족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데, 화의 관점으로 보면 진시황의 출신지인 진나라는 중국 서쪽에 존재했다. [[전국시대|전국시대(중국)]] 문서 참고. * 중국 문자와 한국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적지가 5000~6000년 전에 조성되었다는 주장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주장이다. 유사역사학자들은 이때 발견된 문자가 바로 [[가림토]]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를 근거로 한자도 우리나라의 문자라고 주장하기도한다. '[[가림토]]'라는 존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더라도 여러 자료들을 교차검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은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 등장하였고 [[환단고기]]에서는 가림토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2181년으로 약 4000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이마저도 가림토의 제작연대가 올라갔다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3세 단군인 가륵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니'라며 가림토의 제작연대를 아주 정확하게 기록했다. 두 거짓말이 부딪여 헛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피라미드 조성의 시점을 올려도 너무 많이 올려버렸다. * [[백김치]]가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배추김치]]를 보존하는 놀라운 기술력은 둘째로 넘기더라도~~ 이 글을 쓴 사람은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비로소 전래된 건 알아도 [[배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점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배추의 어원은 백채(白菜)로, 중국 남북조시기(6세기)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4131&cid=50802&categoryId=50809|순무를 품종 개량하여]] 만들어진 [[채소]]이기 때문에 결코 5천 년 전의 고대 유적지에서 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비로소 고려시대 이후에야 약재로 쓰인다며 처음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배추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점은 고춧가루가 들어온 시점보다 늦고 그전까지는 서민들은 배추김치를 먹을 엄두조차 못 냈다. * 쐐기를 박는 것은 그들이 1945년 혹은 1963년에야 피라미드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주장은 서구 음모론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사실 뒤늦게야 서구의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음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학계와 관계없는 대다수 대중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고분이 한나라 시대 무덤임을 이미 알고 탐험대들을 보냈다. [[https://www.jstor.org/stable/2717791|1914년 학술 보고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